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짜빈동 전투 (문단 편집) == 대한민국 국군 상황 == [[1966년]] [[9월 23일]] 제2 해병여단은 베트남 중부 꽝응아이성(Tỉnh Quảng Ngãi; 省廣義) 북부 지역 쭈라이(Chu Lai; 茱萊)로 이동해 지역 평정 작전을 시작했다. 그러나 해당 지역은 베트콩(Việt Cộng; 越共)의 활동이 상당히 왕성한 지역으로, 북베트남 정규군의 침투가 용이한 지역이었다. 기지 바로 남쪽의 짜빈동 마을은 대한민국 국군이 [[우물]]을 이용하기 위해 자주 찾는 곳으로 주민들과 군인들이 친밀한 상태였다(고 국군은 믿고 있었다). 그러나 잦은 부비트랩 폭발 사고로 조사한 결과 주민들이 논밭에서 일하는 척 부비트랩을 매설하는것을 발견하고 주민들이 일하던 곳을 피해서 다니자 부비트랩 사고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즉 우호적 관계라고 믿었던 주민들은 친베트콩 성향이었고 중대 기지는 사실상 적지에 있는 거나 다를 바가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전투 당일인 [[1967년]] 2월 14일에 이미 다수의 적이 기지 가까이에 피난민으로 위장하여 매복하고 있었음[* 당시 중대장이었던 정경진 대위의 증언]에도 국군에게 발각되지 않았다. 다만 피난민들이 중대 기지 근처를 떠도는 것을 수상하게 여긴 중대장의 판단으로 경계를 강화했다. 당시 짜빈동 기지 내에는 3개 소총 소대, 1개 화기 소대, 그리고 배속 부대로 1중대 1소대, 4.2인치 [[박격포]] 1개소대, 81mm 박격포 1개소대, 81mm 박격포 1개반, 106mm 무반동총 1개 분대 등으로 총병력 294명이었고 다음 간부들의 지휘를 받았다. 중대장 정경진 대위, 부중대장 양백수 대위, 화기소대장 김기홍 중위, 1소대장 신원배 소위, 2소대장 김성부 소위, 3소대장 이수현 소위, 60mm 박격포 반장 김상열 중사, 1중대 3소대장 정정상 소위, 105mm 포병 관측장교 김세창 중위, 중포중대 1소대장 [[FDC]] 반장 김세기 대위, 중포중대 2소대장 이정국 중위. 이 병력은 북쪽에 3소대, 남서쪽 1소대, 남동쪽 2소대를 배치했고 주요 화기를 중앙에 배치하여 전 지역에 대한 지원이 가능하도록 배치되었다. 그리고 증원된 1중대 3소대가 예비로 각 소대 후방에 1개 분대씩 배치됐다가 적의 주 접근로였던 3소대 후방에 다시 배치됐다. 그리고 [[2월 14일]]에서 [[2월 15일]] 밤사이에 걸쳐 규모가 증강된 연대 규모의 북베트남군이 짜빈동(Trà Bình Ðông; 茶平東) 일대에 위치하던 대한민국 국군 해병대 2여단 3대대 11중대의 전술 기지를 급습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